Polestarart Gallery

전시기간 : 2022년 04월 05일 ~ 2022년 04월 30일
참여작가 : 노마
전시장소 : Polestarart Gallery
서울시 성동구 서울숲6길 17 폴스타아트 갤러리 B1
21st Century's Mona Lisa
NOMA Solo Exhibition - 21c 모나리자




















NOMA
21c 모나리자
야경
밤거리를 걷다보면 땅 위에 별들이 가득하다. 하늘을 차지한 별들은 그 자리를 잃고,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 빛이 우리를 감싸고 무장 해제된 감성을 촉촉히 건드린다. 아름다워서 셔터를 터트리는 사람들, 그 사이에 나는 그들과 동요되지 못하고 저 소모되는 빛들 속에서 왜 슬픔을 느끼는가. “잠이라는 자유로움을 버리고 얻은 아름다움” 그 소제목으로 시작한 야경시리즈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기본적인 욕구 잠(수면)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소모되고 대체 가능한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NOMA작가의 첫 작품 시리즈다. 밤에도 꺼질 줄 모르는 인공의 빛은 자연의 빛과 달리 대체가능한 소모품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러나 야경 시리즈를 전시할 당시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아름답게만 보는 관객의 시선은 충격이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쏟아내도 그렇게 봐주지 않는 그들은 갓 등단한 시인의 가슴을 닮은 노마작가에겐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의 휠지 모르는 진지함과 고집스러운 열정은 결국 야경을 그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야경은 고스란히 젊은 예술가로서 첫 상흔이 되었다.
롤랑바르트는 “나는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관심을 가진다.”며 사진이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 연구했다. 수많은 사진 속에서 유독 개별자인 나에게 의미있는 이미지를 맞닥뜨리면 “충격”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저택의 사진을 보며 공포감을 느낀다고 생각해보라. 그와 유사한 집에서 어릴 적 폭행을 당한 소녀가 그 이미지 앞에 서게 됐을 때의 감정은 어떨까.그것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현현히 눈앞에 재현되는 고통이다. 개인에게 특수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사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장면과 이미지에서도 마찬가지다. NOMA작가의 푼크툼이 된 야경의 씁쓸하고 처연한 인간의 현실은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호응되지 못했을 뿐이다.
작가의 경험은 다른 작업으로의 전환점이 된다. NOMA작가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이 오히려 감정에 의해 촉발된 아름다움이 아닐까라는 사유를 통해 인간의 감정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한다. 우회된 야경보다 직관적인 인물화를 통해 적나라하게 인간을 표현함으로서 관객을 작가의 세계로 끌어오겠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날것(脫)>,<플라스틱 페이스>,<감춰진 정동>展을 포함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야경의 후속 전시들은 당연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집중한 인물화였으며, 마침내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유들이 서로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21st century’s Mona Lisa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이론적으로,기법적으로 여러 시도와 연구를 한 NOMA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모든 작품의 제목을 21세기 모나리자로 명명한다. 15세기의 온화한 미소로 그 시대의 대중성을 확보한 모나리자의 인물화처럼, 자신이 그리는 인물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자 자화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확장되어 현실의 모나리자,21세기의 모나리자가 되었다.
NOMA의 모나리자는 그야말로 제목만 차용된 것이다. 포슬한 스푸마토의 자리를 대신해 휘몰아치는 날 것의 터치들이 촉각을 다루는 우리의 불안한 삶을 반영하듯 역동한다. 비틀거리는 내가 보이고 연약한 너의 초상들이 억제된 욕망의 껍질을 벗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21세기 모나리자는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가 된다.
불
이리 저리 불꽃이 일어난다. 너와 나일지 모르는 얼굴 위로 때론 더듬듯이 때론 뿌리듯이 불꽃을 던지면서 물감 위를 지나간 곳에 규정하지 않은 텍스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불은 쇼잉을 위한 퍼포먼스도, 그리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도구도 아닌 작품을 위해 작가가 찾아낸 회화재료다. 억압된 욕망과 감춰진 감정들이 자리를 잃고 유령처럼 떠도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은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성별을 없앤 인간 그 자체의 얼굴 위로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듯 허락을 필요치 않는 알맹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캔버스 위의 불꽃은 고조된 나의 감정을 더욱 달구듯 스쳐간다.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가 자유를 외친다.
불 끝에서 전해지는 터치의 가압의 정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도록 물성을 체화한 작가의 노력은 그가 철저히 의도하는 방향으로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물감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던 질감표현을 위해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시도했고 그렇게 불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전시라는 무대에 오르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고양이
“고양이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솔직하다. 인간은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을 숨기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예술가에게 예술가적인 고집이란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작품의 표현방법일지 삶의 태도일지 가치관일지는 개개인마다 다를테지만, NOMA에게 있어서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우연에 힘이 아닌 필연으로서 완성시키려는 굳은 고집이 있다. 그러기에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도 계획하고 실행하며 자신과의 타협에 인색함을 보인다. 작품에 대해 솔직한 태도는 스스로에게 관대할 수 없기 분명 고통스러운 과정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설레던 그에게도 작품의 완성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는 20여년을 고양이와 함께 했다. 버려지고 학대되는 고양이들을 돌봤으며 현재는 유기묘인 Hola와 함께 생활한다. 키우던 고양이를 잃고 몇 개월을 애도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작가로서의 그를 바라보니 솔직한 감정을 사랑한 그에게 감정적으로 상처주지 않고 자신을 감추지 않는 대상인 고양이가 아름답게 보였으리라. 자신을 둘러싼 유동하는 것들은 항상 자신을 닮은 것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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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의 인물들은 성별이 없다. 그가 다루는 주제에 그 분류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인물은 여성과 남성을 혼합된 형상으로 존재하며 특정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드물다. 설사 수십 번을 본 인물을 보고 그릴 때조차 중첩된 다른 인물을 떠올리면서 명확한 주인공이 초상에 등장할 수 없게 만든다.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자유로움은 작가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인간상이며 한편으론 내재된 그의 소망의 발현이다. 시대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무력한 초상들이 작가의 작품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예술가는 그들의 소명에 충실하였고 우리는 현재를 가늠하는 눈을 얻게 되었다.
<21세기 모나리자>展은 해외전시를 주로 하던 NOMA작가가 오랜만에 한국에서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신작이 주를 이루는 전시는 기존의 작가의 작품에서 새롭게 변주되었다. 좀 더 명확해진 인물의 이미지 위에 벗겨지고 오린듯한 형체들이 화려한 색을 하고 부유한다. 단단하고 말짱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초연하지 못한 불안하고 연약한 눈빛의 초상은 우리의 자화상이자, “부조리한 실존” 그 자체를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실존의 이유를 잃은 우리의 선택지가 죽음 뿐이라면 인생은 단순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바니타스적인 삶에 머무르지 않는다. 타협된 현실에 균열을 주고 미약한 자아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비로서 숨겨진 나의 감정들이 틈을 비집고 각자의 소리는 낸다.
작가는 벗겨진 날 것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이전의 작품에서 벗어나 제한적인 감정만을 표출한다. 현실의 폭압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의 감정은 최소화 될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 지켜져야한 것들의 자리에 복종의 시나리오가 지속된다면 자아는 설 곳을 잃게 된다. 불안정함을 끌어안고 주저앉기보다 현재를 직시할 때 존재의 영역은 확장된다. 강하게 휘어진 활시위가 부러지듯 마구 쏟아내는 감정은 무모한 결과를 생산하다. 그렇게 작가의 절제되고 제한된 감정은 삶을 끌어가기 위한 현명한 방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유독 NOMA의 작품은 생생한 장면이 연출된다. 일정한 방향을 정하지 않는 속도감 있는 붓질과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내려앉은 유동하는 덩어리들, 떨어지고 뿌려진 형형색색의 물감들 그리고 캔버스 전체를 가로 지르는 불꽃의 흔적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공간을 메운다. 미처 쏟아내지 못한 가련한 감정들이 무너질 듯 가슴에 내려앉아서일까. 불이 스쳐간 자리 위로 매서운 아픔이 즉물적인 고통을 전달한다. 빠른 속도로 그려 나가는 NOMA의 작품은 시간을 응축해 흩어지지 않다가 관객의 눈 앞에서 퍼져나간다. 21세기 모나리자는 하나의 초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너와 나의 역사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글 / 폴스타아트 갤러리 남보라 (대표이사) - 2022' 04
21c 모나리자
야경
밤거리를 걷다보면 땅 위에 별들이 가득하다. 하늘을 차지한 별들은 그 자리를 잃고,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 빛이 우리를 감싸고 무장 해제된 감성을 촉촉히 건드린다. 아름다워서 셔터를 터트리는 사람들, 그 사이에 나는 그들과 동요되지 못하고 저 소모되는 빛들 속에서 왜 슬픔을 느끼는가. “잠이라는 자유로움을 버리고 얻은 아름다움” 그 소제목으로 시작한 야경시리즈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기본적인 욕구 잠(수면)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소모되고 대체 가능한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NOMA작가의 첫 작품 시리즈다. 밤에도 꺼질 줄 모르는 인공의 빛은 자연의 빛과 달리 대체가능한 소모품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러나 야경 시리즈를 전시할 당시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아름답게만 보는 관객의 시선은 충격이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쏟아내도 그렇게 봐주지 않는 그들은 갓 등단한 시인의 가슴을 닮은 노마작가에겐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의 휠지 모르는 진지함과 고집스러운 열정은 결국 야경을 그리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야경은 고스란히 젊은 예술가로서 첫 상흔이 되었다.
롤랑바르트는 “나는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관심을 가진다.”며 사진이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 연구했다. 수많은 사진 속에서 유독 개별자인 나에게 의미있는 이미지를 맞닥뜨리면 “충격”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저택의 사진을 보며 공포감을 느낀다고 생각해보라. 그와 유사한 집에서 어릴 적 폭행을 당한 소녀가 그 이미지 앞에 서게 됐을 때의 감정은 어떨까.그것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현현히 눈앞에 재현되는 고통이다. 개인에게 특수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사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장면과 이미지에서도 마찬가지다. NOMA작가의 푼크툼이 된 야경의 씁쓸하고 처연한 인간의 현실은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보편적 인식에 호응되지 못했을 뿐이다.
작가의 경험은 다른 작업으로의 전환점이 된다. NOMA작가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이 오히려 감정에 의해 촉발된 아름다움이 아닐까라는 사유를 통해 인간의 감정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한다. 우회된 야경보다 직관적인 인물화를 통해 적나라하게 인간을 표현함으로서 관객을 작가의 세계로 끌어오겠다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날것(脫)>,<플라스틱 페이스>,<감춰진 정동>展을 포함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야경의 후속 전시들은 당연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집중한 인물화였으며, 마침내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유들이 서로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21st century’s Mona Lisa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이론적으로,기법적으로 여러 시도와 연구를 한 NOMA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모든 작품의 제목을 21세기 모나리자로 명명한다. 15세기의 온화한 미소로 그 시대의 대중성을 확보한 모나리자의 인물화처럼, 자신이 그리는 인물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자 자화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확장되어 현실의 모나리자,21세기의 모나리자가 되었다.
NOMA의 모나리자는 그야말로 제목만 차용된 것이다. 포슬한 스푸마토의 자리를 대신해 휘몰아치는 날 것의 터치들이 촉각을 다루는 우리의 불안한 삶을 반영하듯 역동한다. 비틀거리는 내가 보이고 연약한 너의 초상들이 억제된 욕망의 껍질을 벗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21세기 모나리자는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가 된다.
불
이리 저리 불꽃이 일어난다. 너와 나일지 모르는 얼굴 위로 때론 더듬듯이 때론 뿌리듯이 불꽃을 던지면서 물감 위를 지나간 곳에 규정하지 않은 텍스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불은 쇼잉을 위한 퍼포먼스도, 그리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도구도 아닌 작품을 위해 작가가 찾아낸 회화재료다. 억압된 욕망과 감춰진 감정들이 자리를 잃고 유령처럼 떠도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은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성별을 없앤 인간 그 자체의 얼굴 위로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듯 허락을 필요치 않는 알맹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캔버스 위의 불꽃은 고조된 나의 감정을 더욱 달구듯 스쳐간다.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가 자유를 외친다.
불 끝에서 전해지는 터치의 가압의 정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도록 물성을 체화한 작가의 노력은 그가 철저히 의도하는 방향으로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물감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던 질감표현을 위해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시도했고 그렇게 불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전시라는 무대에 오르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고양이
“고양이는 감정적으로 완전히 솔직하다. 인간은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을 숨기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예술가에게 예술가적인 고집이란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작품의 표현방법일지 삶의 태도일지 가치관일지는 개개인마다 다를테지만, NOMA에게 있어서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우연에 힘이 아닌 필연으로서 완성시키려는 굳은 고집이 있다. 그러기에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도 계획하고 실행하며 자신과의 타협에 인색함을 보인다. 작품에 대해 솔직한 태도는 스스로에게 관대할 수 없기 분명 고통스러운 과정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설레던 그에게도 작품의 완성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그는 20여년을 고양이와 함께 했다. 버려지고 학대되는 고양이들을 돌봤으며 현재는 유기묘인 Hola와 함께 생활한다. 키우던 고양이를 잃고 몇 개월을 애도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작가로서의 그를 바라보니 솔직한 감정을 사랑한 그에게 감정적으로 상처주지 않고 자신을 감추지 않는 대상인 고양이가 아름답게 보였으리라. 자신을 둘러싼 유동하는 것들은 항상 자신을 닮은 것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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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의 인물들은 성별이 없다. 그가 다루는 주제에 그 분류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인물은 여성과 남성을 혼합된 형상으로 존재하며 특정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드물다. 설사 수십 번을 본 인물을 보고 그릴 때조차 중첩된 다른 인물을 떠올리면서 명확한 주인공이 초상에 등장할 수 없게 만든다.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는 자유로움은 작가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인간상이며 한편으론 내재된 그의 소망의 발현이다. 시대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무력한 초상들이 작가의 작품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예술가는 그들의 소명에 충실하였고 우리는 현재를 가늠하는 눈을 얻게 되었다.
<21세기 모나리자>展은 해외전시를 주로 하던 NOMA작가가 오랜만에 한국에서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신작이 주를 이루는 전시는 기존의 작가의 작품에서 새롭게 변주되었다. 좀 더 명확해진 인물의 이미지 위에 벗겨지고 오린듯한 형체들이 화려한 색을 하고 부유한다. 단단하고 말짱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초연하지 못한 불안하고 연약한 눈빛의 초상은 우리의 자화상이자, “부조리한 실존” 그 자체를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실존의 이유를 잃은 우리의 선택지가 죽음 뿐이라면 인생은 단순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바니타스적인 삶에 머무르지 않는다. 타협된 현실에 균열을 주고 미약한 자아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비로서 숨겨진 나의 감정들이 틈을 비집고 각자의 소리는 낸다.
작가는 벗겨진 날 것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이전의 작품에서 벗어나 제한적인 감정만을 표출한다. 현실의 폭압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의 감정은 최소화 될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 지켜져야한 것들의 자리에 복종의 시나리오가 지속된다면 자아는 설 곳을 잃게 된다. 불안정함을 끌어안고 주저앉기보다 현재를 직시할 때 존재의 영역은 확장된다. 강하게 휘어진 활시위가 부러지듯 마구 쏟아내는 감정은 무모한 결과를 생산하다. 그렇게 작가의 절제되고 제한된 감정은 삶을 끌어가기 위한 현명한 방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유독 NOMA의 작품은 생생한 장면이 연출된다. 일정한 방향을 정하지 않는 속도감 있는 붓질과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내려앉은 유동하는 덩어리들, 떨어지고 뿌려진 형형색색의 물감들 그리고 캔버스 전체를 가로 지르는 불꽃의 흔적들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공간을 메운다. 미처 쏟아내지 못한 가련한 감정들이 무너질 듯 가슴에 내려앉아서일까. 불이 스쳐간 자리 위로 매서운 아픔이 즉물적인 고통을 전달한다. 빠른 속도로 그려 나가는 NOMA의 작품은 시간을 응축해 흩어지지 않다가 관객의 눈 앞에서 퍼져나간다. 21세기 모나리자는 하나의 초상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너와 나의 역사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글 / 폴스타아트 갤러리 남보라 (대표이사) - 2022' 04